본문 바로가기

문화/공연·전시

[박정기의 공연과 문화] 글로리아 최 기획총괄 유승봉 예술감독 김도현 작 연출의 '여도' 戾悼

[문화뉴스 MHN 아띠에터 박정기] 한전안트센터에서 ㈜컴퍼니다&㈜뮤제이엔엠&에스엔지 컴퍼니의 글로리아 최 기획총괄, 유승봉 예술감독, 김도현 작 연출의 여도(戾悼)를 관람했다.

연출을 한 김도현은 현재, 아리랑 TV에서 차장 프로듀서로 근무 중,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Florida State Univ.) 영화학과 대학원(the School of Motion Picture, Television & Recording Arts) 실무 과정 석사학위(Master of Fine Art) 취득, TBC 대구방송 생방송, 좋은 아침, 경주 남산부처의 얼굴 연출, SBS 서울방송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ENG 방송 프로그램 연출, 아리랑 TV Pops In Seoul, 퀴즈 챔피언, Korea 101, a plus 외 다수의 다큐멘터리 연출을 한 발전적인 장래가 예측되는 연출가다.

연극 여도(戾悼)는 조선 6대 임금 단종과 그의 숙부이자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이야기를 그렸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숙부에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 단종과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비정한 임금 세조의 이야기를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으로 풀어낸 추리 사극이다.


1441년 단종은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과 왕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몸이 약한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후가 죽자 어린 세손을 가련히 여긴 세종은 소헌왕후와 의논하여 자신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고, 세종의 후궁으로 조모뻘인 혜빈 양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1448년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병중이었던 세종은 자신이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병약한 아들 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늘 어린 손자 단종을 몹시 걱정했다. 문종마저 요절하고 나면 야심으로 가득 찬 둘째 아들 수양대군을 비롯한 혈기왕성한 여러 대군 사이에서 어린 손자가 아무 탈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전에 황보인·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왕세손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다.

단종은 1448년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450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52년(문종 2년) 4월 문종은 수양대군을 관습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야심을 철저히 숨기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는 등 자신의 뜻을 철저히 감추었다. 그가 관습도감 도제조가 되자 사간원에서 종친에게 실직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했으나, 문종이 듣지 않았다. 세종이 우려했던 대로 문종은 즉위한 지 겨우 2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말았다.

1452년 단종은 문종의 뒤를 이어 12살에 왕위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을 만큼 영리하였으나,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므로 혼자서 나랏일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의정부의 신하들이 도맡아 했고, 단종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특히 인사 문제는 ‘황표정사(黃票政事)' 라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어린 단종의 즉위 이래 정국이 불안해진 가운데 위축된 왕권과 달리 수양대군 등 종친의 세력은 나날이 팽창되어 갔다.

수양대군은 종친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비밀리에 측근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족과 성리학자들의 지지를 획득한다. 이후 수양대군은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등을 역임하며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된다.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영풍군, 정종 등은 단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문종의 후궁인 숙빈 홍씨 등은 정보를 훈신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 경쟁은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453년 계유정난을 불러왔다.

1453년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김종서·정분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1454년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 1등관에 서훈하였다. 계유정난으로써 수양대군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고 말았다.

1454년에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의 나머지 측근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하는 일이 일어나자 계유정난을 계기로 일부 신료들은 단종이 양위해야 된다는 공론을 세웠고 이는 통과되었다. 1455년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한명회·권람 등에게 선위를 강요받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다.

1456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김문기 등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조가 즉위한 이듬해에 성삼문·유성원·하위지 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무인들은 연회 때 별운검을 설치한 뒤 세조 3부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가담자의 한명인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말하고, 정창손의 설득에 의해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하여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그 바람에 1457년 단종은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노산군(魯山君),즉 폐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1457년 금성대군은 배소인 순흥에서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운다. 금성대군,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도 같이 죽음을 내렸다. 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

1457년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17살의 어린 나이로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숙종실록》에는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단종을 찾아가 차마 아무 말도 못하자, 그를 모시고 있던 자가 그를 해하였다고 한다. (교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단종이 죽자 아무도 그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였으나[3], 영월군의 호장(戶長)인 엄흥도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지를 찾던 중, 눈보라가 치던 곳에서 사슴이 앉았다가 사라진 곳을 보고, 그 곳에 가매장하였다. 단종을 매장한 뒤 엄흥도는 가솔들을 이끌고 영월을 떠났다.

공적으로는 단종의 추모가 금기시되었지만 사망 직후 정보, 이수형 등은 복상하고 3년 상을 치루기도 했다. 사후 무속에서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단종은 죽은 뒤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중종 때 사림에 의해 복권 논의가 나왔으나 거절당하였다. 사림의 한 갈래인 서인, 노론은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여 중종과 효종 때 단종의 복권 여론을 조성했다. 사망한 지 241년 만인, 1698년, 숙종 24년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무대는 바닥이 객석을 향해 비스듬히 내려간 무대다. 휘장 같은 천을 장면변화마다 늘어뜨리고, 궁중내실은 삼각형과 사각형의 무늬가 들어간 가리개를 정면에 늘어뜨려 좌우로 열고 닫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배경에는 용의 문양이 들어간 커다란 휘장을 드리움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상징토록 했다.

의상....이토록 화려하고 격조 높은 의상을 등장인물들이 착용하다니...! 의상의 고풍스러움과 화려함은 극 분위기를 근엄함과 위계감을 상승시키고 궁중복식의 고품격과 다양함을 관객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배경 막 뒤에 자리한 국악관현악단의 연주는 극과 적절히 배합되고 조화를 이루어 극 분위기 창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궁중 무용장면이나 무예 장면 그리고 광대들의 연희장면 또한 극과 어우러져 극을 수준급 공연으로 이끌어 간다. 출연자 각자의 연기력 또한 성격창출에서부터 감정 설정에 이르기까지 각자 독특한 연기력을 발휘해 호연과 열연 그리고 열창으로 관객의 갈채를 이끌어 낸다. 특히 연출가의 역사 추리 극으로 설정과 연출은 관객을 극에 몰입시키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낸다.

송승현, 힘찬, 신민수, 박정학, 김정균, 강효성, 전국향, 병헌, 이민혁, 이선, 공현주, 김사희, 이혜수, 김원식, 백승현, 임석주, 김준 안홍진, 양창완, 윤예주, 차윤지, 이달형, 박용 등이 더블캐스팅 또는 트리플 캐스팅 되어 출연해 각자 열정을 다한 기량을 발휘하고, 신동혁, 윤민구, 김혁종, 박태현, 김두현, 박현준, 김만중, 홍대경, 강지연, 손미리, 지희, 신희정, 이기리, 원규리, 전하엘, 허유진 등 출연진이 앙상블을 이루어 호연과 열연 그리고 무용으로 갈채를 받는다.

악사로는 건반 김현섭, 소리 이정원, 소리 신승수, 대금 윤지원, 피리 이찬우, 가야금 윤미라, 거문고 강인아, 아쟁 김슬지, 타악기 김도희 등 소리꾼과 악사들의 기량이 극 전체에 드러나 역시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는다.

제작총괄 글로리아 최, 예술감독 유승봉, 제작감독 김완식, 제작이사 김창대, 드라마투르기 배진아, 작곡 지휘 김현섭, 안무감독 오선희, 무술감독 이규완, 무대디자인 서숙진, 음향디자인 김성욱, 조명디자인 정진철, 분장디자인 김숙희, 의상디자인 김혜민, 무대감독 정지환, 조연출 마은우, 켈리그라피 김성태, 포토그래퍼 표창열, 그래픽디자인 강동성 그래픽, 협찬 장이인미디어인권협회&(주)아마란스 등 제작진과 기술진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기량이 합하여, ㈜컴퍼니다&㈜뮤제이엔엠&에스엔지 컴퍼니의 글로리아 최 기획총괄, 유승봉 예술감독, 김도현 작 연출의 여도(戾悼)를 작품성, 연극성, 예술성, 대중성을 살린 괄목할만한 우수걸작공연으로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