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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춤

[문화人] 내가 춤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폴댄스 최나영 교수

[문화뉴스] "성공이란 무엇인가?"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 답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대답인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누구나 꿈이 있지만 꿈을 이루고 살아가진 못하며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얼마 전 ' 서울대 교수와 학생의 대화 ' 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 청소년 자살률을 줄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한 학생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된다고 대답하면서 부모님과 선생님의 압박, 집단 따돌림, 성적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 모든 청소년 자살의 원인은 학교라도 답했다. 

그 학생은 학교에서는 인생을 포기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개인의 개성과 재능은 무시된 채 상위 1 ~ 2%만이 기억된다고 말했다. 분명 98%들도 1 ~ 2%가 가지지 못한 재능이 있을 텐데 사회는 나머지 98%를 기억하지 않는다며, 성공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행복해지고 싶다고.

이에 교수는 왜 행복해 지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무엇을 하면 행복하겠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하고 싶은 것은 있지만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그 일이 사회적으로 명성을 쌓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면서, 어떤 일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 일을 직업으로 하기에는 모든 것이 불안정하다고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그 일을 하면 돈은 멀리해도 좋겠다는 생각과 각오는 해봤는지.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행복한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나의 대답은 Yes!

나는 강원도 시골 마을에서 자라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조용한 성격에 남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아이였다. 어릴 적 공부는 곧잘 하여 부모님은 선생님 또는 간호사가 되길 원하셨지만 난 그림이 좋았다. 소질도 있었지만 학원에 다닐 형편은 되지 않아 특기생으로 학교에서 방과 후 교육을 들으며 상도 많이 받고 나름 인정도 받았었다.

하지만, 시골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었다. 부모님도 그림 그려서 뭐 해 먹고살 거냐며 싫어하셨고 그냥 평범하게 공부만 열심히 하기를 바라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반별 장기 자랑에 친구의 권유로 난생처음 춤이란 것을 추게 되었다.

나의 첫 무대는 앞이 깜깜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나는 것은 무대의 화려한 조명과 함성뿐 이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잊지 못했고 그 후로 춤에 열정을 쏟았다. 나의 사춘기 시절의 첫 반항이었다. 당연히 부모님은 반대가 심하셨고 얌전하게만 지내던 아이가 춤을 추겠다며 힙합바지에 머리를 염색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모습이 좋아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시골 좁은 마을에 나는 날라리였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춤을 추는 아이로 불렸다.

그 시선이, 그 수군거림이 나를 오히려 바로 잡아 주었다. 나 때문에 손가락질 받게 되실 부모님께 죄송했고 부모님이 속상해하시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 스스로와 약속했다. 춤추는 것 외에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으리라.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가 선택한 길을 순탄치만은 않았다. 학원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고 방학이 되면 도시로 가서 연습생 생활을 하며 잘 곳이 없어 지방에서 모인 연습생들과 연습실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다. 더운물이 나오지 않아 추운 겨울, 찬물로 머리를 감고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때로는 무시를 당하고 때로는 맞기도 하면서 남몰래 울기도 했다. 하지만, 그땐 그래도 행복했다.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친구들이 있어 힘이 되었다. 그때가 18세였다.

고3이 되던 해 단순히 춤이 좋아 춤만 추기엔 미래가 없었다. 할 줄 아는 것은 춤뿐이었는데 대학교에 진학은 해야 했고, 당시 지금처럼 실용댄스과가 많지 않았던 때라 나의 고민은 더해갔다.

그냥 춤이 좋다는 것 외에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춤으로 먹고 살 수 있을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대학교를 진학한들 무슨 과를 지원해야 될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현실에 부딪히는 순간이었다. 대학엔 가야 한다. 그런데 무슨 과를 가야 하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춤인데 그 어디에도 내가 원하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대학에 가야 하는 것인가?

그러다 우연히 댄스스포츠 학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 이거야 장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가자'

졸업 후에도 안정된 미래는 없었다. 시간 강사로 일은 했지만 넉넉하진 않았고 무용 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똑같이 일하고 차별 대우도 받았다. 억울했다. 분명 내가 더 잘 추는데. 한국무용 전공자가 재즈를 하는 것보다 내가 더 잘한다.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이 나보다 학벌이 더 좋다. 이 또한 현실이었다.

'그래. 그럼 보다 전문적으로 자격증을 따보자'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벨리댄스였다. 벨리댄스 자격증을 따고 협회 소속 강사로, 교수님 조교로 일을 하면서 6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그렇게 안정을 찾아가나 싶었지만 협회의 내부적으로 잡음이 많았고 사람에 치여 가고 있었다.

이제 좀 쉬어야겠다. 하고 싶었던 일이 직업이 되는 순간 즐겁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좋아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춤을 출 때부터 즐겁지 않았다.

'떠나자'

그렇게 나의 일본 여행은 시작되었고 그곳에서 새로운 나의 길을 찾게 되었다.

그것이 '폴댄스'였다.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이 첫 번째 매력이었고 춤에 대한 회의를 느낄 때 나에게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2008년 한국에 돌아와 연습실을 마련하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나라에선 처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욕심이 없었다. 하다 보면 언젠간 누군가 알아주겠지라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 다시 즐거워졌다. 돈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광고도 하지 않았는데 배우러 찾아오는게 신기하고 감사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일이 다시 즐거워졌다.

처음 폴댄스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업소 나갈 거냐며 스트립쇼라도 할 것이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나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이 일이 즐겁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도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패하진 않을 것이다. 이 일로 부와 명예를 얻을 자신은 없지만 이 일이 나를 즐겁게 할 것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살다 보면 좀 굶을 수도 있고 남의 집 청소라도 하면서 돈은 벌 수 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삶이 결코 행복한 삶은 아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즐기며 살자, 돈에 연연하는 삶이 즐겁지가 않더라'

넉넉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남들이 손가락질 할 수도 있다. 보장되지 않은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성공한 삶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폴댄스를 시작한 지 벌써 6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이렇게 에세이도 쓰게 되었고 강단에 '폴댄스' 과정을 열어서 제자를 양성할 준비도 되었다.


                                             △ 최나영 대표 (가운데)



최나영

폴댄스 코리아 대표

국민대학교 문화예술소셜댄스스포츠학부 교수

[정리] 문화뉴스 이밀란 기자 pd@munhwanews.com